그날 나는 광장에서 희망을 보았다 김종분 (전)전라남도여성가족정책관 호남in뉴스 jjsin1117@naver.com |
[호남인뉴스] 2024년 12월 3일 화요일 밤 10시 25분, 비상계엄령이 발동한 서울의 겨울은 끔찍했다. 탱크가 국회 앞에 도열해있고 헬기에서 내린 계엄군들이 국회의사당 창문을 깨뜨리고 본회의장으로 달려가는 장면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혀 생중계되었다. 1980년 계엄 하에서 서울의 봄 시위를 이끌고 광주항쟁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린 뒤 구속되어 수도경비사령부로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았던 나는 심장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그날 밤, 전화로 비상계엄을 처음 알려준 이는 경기도에서 직장에 다니는 둘째였다. 설마했지만 사실이었다. 둘째의 전화를 끊고 큰애에게 전화를 했다. 큰애는 퇴근 중이었다. 이후 두 아이는 번갈아 전화를 해대며 국회 앞으로 가겠다고 했다. 계엄을 막아야한다는 것이었다. 탱크가 국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가면 다 죽어. 계엄군들은 명령받은 대로 총을 쏠 거야. 내가 만류했지만 둘째는 죽지 않는다고 했다. 어머니 시대의 군인들과 지금의 군인들은 다르다고 했다. 군 수뇌부가 명령을 해도 병사들은 국민을 향해 함부로 총을 쏘지 않을 거라고 둘째는 장담했지만 광주의 참상을 아는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큰애는 총을 쏘면 맞으면 되지라고 했다. 둘째야 미혼인데다 평소에도 정치에 관심이 많아 국회 앞으로 간다고 해도 별로 놀랄 게 없었지만, 큰애는 정치에 일체 노코멘트해왔고 5살 난 아이의 아빠인지라 큰애마저 국회 앞으로 간다는 바람에 심장 박동수가 더 올라갔다. 그날 밤, 국회 앞에 모인 사람들은 온몸으로 탱크를 막으면서 계엄군의 국회 진입을 실시간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이튿날 새벽 1시 1분에 국회는 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을 의결했고 새벽 4시 30분에 계엄은 해제됐다. 광장민주주의의 승리였다.
6시간동안의 계엄 상황이었다지만 잠들 수 없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죽고 계엄이 선포된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때 교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교문 앞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계엄군은 아무데서나 가방을 뒤졌고 말대꾸라도 할라치면 잡아다 포고령위반이나 간첩으로 만들어 구속시켰다. 1980년 5월 서울의 봄 시위를 이끌었고 17일 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예비검속대상자가 된 나는 정처없이 도피생활을 했다. 훈련받은 계엄군들은 적지에 침투하듯 광주에 들어와 총격으로 시민들을 죽였다. 내 기억 속의 계엄은 그런 형상이었다. 그런데 2024년에 계엄이라니. 그동안 계엄설은 꾸준히 나돌았지만 설마 그럴까싶었다. 그런데 실제 일어났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가진 나라에서 대통령이 일으킨 친위쿠데타라니 윤석열이 꿈꾸는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란 말인가. 민주주의는 또다시 시궁창으로 떨어졌다. 정치도 정치지만 경제가 곤두박질 칠 게 뻔했다. 가뜩이나 지금 힘든데.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 트럼프가 우리나라에 방위비 부담을 지울 거라느니 관세를 높일 거라니 하는데 무슨 권력을 얼마나 더 갖고 싶어서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것일까?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암울했다. 비상계엄의 영향으로 4일 코스피는 마이너스1.97%, 환율은 1418원으로 출발했다. 정치적 불확실성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더욱 심화시켰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는지 민심이 들끓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윤석열을 탄핵하라, 내란수괴를 체포하라는 목소리가 터지면서 연일 집회가 열렸다. 12월 7일 토요일,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해 친구들을 만났다. 다들 60이 넘었지만 1980년 5월 서울의 봄을 겪은 우리들은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계엄을 선포한 자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30분쯤 광화문역으로 갔다. 5호선을 타고 여의도역에서 내려 9호선으로 갈아타고 국회 앞으로 갈 요량이었다. 계엄은 해제됐다지만 윤석열이 또 뭔 짓을 할지 모르고 오늘 국회에서 윤석열 탄핵안이 상정될 예정이었다. 몇날몇일이 걸릴지도 모르고 죽을 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각오가 온몸을 휩쌌다. 전철은 이미 만원이었다. 한 대를 그냥 보내고 다음 전철이 오자 가까스로 밀고 들어갔지만 전철 안에서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혼잡한 관계로 여의도역에 서지 않는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여의나루역에서 내려 앞사람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한강이 보이는 도로를 걸으면서 방송차에서 울려퍼지는 윤석열 탄핵 구호를 따라 외쳤다. 국민일보사 앞길로 돌아서 걸어 내려오는데 행렬이 멈춰섰다. 방송차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는 멘트가 나오면서 대형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으니 그대로 앉자고 했다. 국회의사당 정문 쪽에서 다른 일행과 만나기로 한 나는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사람숲을 헤치고 가는 과정은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국회 앞으로 연결되는 대로는 이미 단체나 개인들이 빼곡하게 자리잡았고 인도에도 서있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청년들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왔지 싶을 정도로 많았다. 깃발도 각양각색으로 만들어서 들고 있었다. 전국까만고양이협회, 전국집에누워있기연합, 전국치즈냥연구회, 피크민꽃심기모임 등. 오호, 저 기발함이란. 청년들의 자유로운 발상이 부러웠다.
여의도는 한마디로 축제장이었다. 팔짱을 끼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아이의 손을 잡고 마실나온 듯 걷는 부부들, 응원봉을 흔드는 청년들, 방송차에서 흘러나오는 인기가요들, 그리고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외치는 구호와 연설이 여기저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정치연설인 듯 아닌 듯 우리시대의 연설과는 사뭇 다른 투로 연설을 하는데 재밌게 잘했다. 비로소 안도의 숨을 길게 내뿜었다. 이제 됐구나. 청년들이 움직이면 국가는 올바르게 가는 거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청년들을 국회 앞으로 모이게 한 동력이 뭐지? 계엄에 대한 분노?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여의도의 분위기는 1980년 서울의 봄과는 분명 다른 분위기였다. 둘째가 말했다. 어머니가 겪은 군사독재나 광주참상과는 다르지만 20대는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를 겪으면서 국가의 방치로 친구가 죽어가는 모습을 본 세대라고. 30대는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불안정한 취업현장과 결혼불가능의 절망을 체험하고 있는 세대라고. 그래서 지금 터지기 일보직전이라고. 윤석열이 잘못 건드린 거라고. 그러고보니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실체를 파헤친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눈물을 흘린 청년들이 많았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광주의 참상을 알려준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고 광주를 찾는 청년들이 많아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렇구나 그랬구나.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았지만 국가권력이 어떻게 움직여야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겨울밤이 깊어지면서 촛불이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우리 시대의 촛불이 아닌 형형색색의 응원봉이었다. 값도 꽤 나가고 팬클럽 회원들에게는 소중한 거라고 했다. 애지중지 아끼는 물건을 들고 탄핵집회에 나온 사람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스크린은 국회 본회의장 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란수괴 윤석열을 탄핵하는 안건 상정을 하기 위해 야당 국회의원들이 집권여당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루하고 초조한 기다림 끝에 국회의장은 정족수 부족으로 탄핵안이 성립되지 않았음을 선포했다. 내란동조자 국민의힘을 해체하라는 광장의 목소리는 더 뜨거워졌다. 국회를 에워싸고 밤샘을 하기 위해 청년들은 오색불을 밝히면서 노래를 하고 내란수괴 처벌과 헌법수호를 외쳤다. 탄핵안은 불성립되었지만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청년들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역사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그날 나는 광장에서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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